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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김만권의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읽고(기본소득과 기초자본에 대하여)

by 통합메일 202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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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읽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노동중심의 정의론은 앞으로의 시대에는 더 이상 통용되기 힘들다. 그러한 규준이 통용될 수 있는, 그리고 통용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 경제적 조건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듯 로봇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일자리가 극도로 줄어든 사회에서 노동을 ᅟᅮᆫ배의 기준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작용하고 있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의 시점에서도 우리들은, 인간들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기준을 매우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부자에 대해서 비도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마치 전통처럼 계속되고 있는 부동산 투기의 흐름을 보자. 우리는 오히려 모두가 앞다투어 경쟁적으로 <일하지 않는 부자>를 꿈꾸고 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사실 사람들은 이미 부유함이나 유복함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스타터라든지,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식으로 염장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노동시장에 들어가기가 힘들고, 들어간다 해도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일하고 싶어도 노동을 위한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노동>을 분배의 기준으로 고집하는 사고는 가장 공정한 분배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취약 계층을 영원히 착취하고자 하는 잔인함으로 읽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잔인한 마음을 먹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자본주의는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것일까.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무산계급은 결코 유산계급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실증하고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의 데이터를 종합한 결과다. 그렇다면 드는 생각은 자본주의는 상당히 근시안적인 기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당장의 효과적 발전은 이룰 수 있겠지만,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류가 영속할 수 있는 길을 찾지는 못할 것 같다. 발전된 인프라는 모든 이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의 도입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기득권의 텃세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당장의 편리와 알량한 우월감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쉽게 말해 기본소득은 나이가 많든 적든 모든 국민(혹은 성인)에게 정기적으로 꾸준히 일정 금액을 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소비능력을 보존하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사회의 모든 가치를 다 쏟아부어야 할 정도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는 게 문제다.

 

한편 기초자본의 경우에는 특정 나이가 된 연령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것이고, 현존하는 상속세만 가지고도 어지간히 충당할 수 있음은 물론 신생아를 대상으로 적립해주는 베이비 본드 제도로 운영하면 재정적 부담을 더욱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예견되듯 탕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1천만원을 똑같이 준다해도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자살하기 전의 마지막 유흥이 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기본소득은 계속 소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먹고 살 수 있고,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다. 한편, 기초자본이라는 것은 인생을 고민하고 설계하게 해준다. 탕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한 번 주어지는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위해 가장 진지하게 숙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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