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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간송전시회 in DDP(동대문 다자인 플라자) 후기

by 통합메일 2019.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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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간청으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열리는 간송미술관 전시회를 다녀왔다.

2014년인가 이후로 두번째 열리는 야외 전시라는 것 같았다.

간송 전형필에 대해서는 일찍 미디어에서도 몇 번이나 다루었던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그 미술관이 일 년에 딱 두 번의 기간 동안만 전시를 한다는 등의 정보는 새롭게 알게 되었다.

듣자하니 미술관이 공사를 하면서 작품들을 바깥에서 전시하게 되었다는 것 같다.

하여간 여러모로.. 당대의 부자였던 간송이 사재를 내어 외국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한 골동품들의 상실을 최대한 막아낸 결과 존재할 수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 같고..

이와 관련된 텍스트들에 대해서 읽을 것이 꽤 많아서 아주 좋았다.

사실 전시품들보다는 그와 관련된 일화들에 대한 텍스트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술회하는 게 맞을 것 이다.

아.. 가격은 1인당 1만원 정도로 준수한 편이었으며

DDP 주차는 DDP구매 영수증 2만원에 1시간, 5만원에 2시간이다.. 예를 들면 4만원의 경우에는 1시간 밖에 안 된다. 우리도 4만 몇 천원이 돼서.... 왈칵

전시장 내부 초입이고.. 전형필이 훗날 인수하게 되는 보성학교 관련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근무했던 인사들의 사진을 의자에 붙여놨는데

적잖이 보기가 불편하였다. 뭔가 참신한 시도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좋을 것 같으나.. 아무리 그래도 위인들의 얼굴을 깔고앉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구축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보성학교 졸업사진인데..
한가운데의 인물이 누굴까..
낯이 익은데 누구지 계속 모르겠어서 멈춰 있었는데.. 아내의 말에 따르면 고종....

아 그래서 눈에 익었구나..

윤리학 교과서..
국한문 혼용의 압박..
그래도 교과서를 활자로 펴낼 정도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훌륭한 교육 환경 아니었겠나

현재의 보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선배들의 뒤를 이어 여전히 독립운동관련지를 순례하는 모양이다. 매우 의미있고 경쟁력 있는 활동일거라고 생각됐다.

3.1절마다 대한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이건 누군가의 성적표인데.. 전체 평균이 60점 미만이거나..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이면 낙제이니 이 경우에는 특히 주의시켜 주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굳이 누구의 성적표라고 아주 잘 보이게 전시를 해서 이것도 좀 불편하였다.

간송은 아주 체구가 좋았다. 집이 부자라 고교 시절에는 축구나 야구도 신나게 했던 모양이다. 나중에는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급성신우염으로 생을 마감한다. 환갑을 넘기지 못했다.

겸재 정선을 화첩이 불타버릴 위기에서 구해진 일화에 대한 텍스트.. 간송 전형필의 일화는 아니고 다른 골동품점 사장의 일화인데 진짜 재미있었다.

근데 암만 정선아라도 사이즈가 작은 건 포스가 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전시의 얼굴마담아라고 할 수 있는 고려청자.. 여기저기 학 무늬가 있다. 미술이나 국사 교과서에서도 봤던 기억이 난다. 근데 일단 오래된 도자기인 만큼 여기저기에 잔 금이 많아 가 있는 건 기본이고.. 뒷통수에 커다랗게 깨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경성미술클럽이라는 경매장에서 간송이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격에 낙찰 받은 도자기다. 드물게도 백자인데.. 난 이 백자도 참으로 좋았다.

연적도 좋았다.

이런 전시물들은 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1.과연 빛을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조명들이 전사품들을 제대로 조영하기 보다는 오히려 시선을 방해한다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2.한자병기가 좀 더 부자런히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세부 안내판을 보면 한자를 확인하르수 있기는 하지만.. 각 전시품에 달라붙은 이름은 죄다 한자이름인데 그걸 한글로만 적어놓다보니 의미 전달이 용이치 않다.

3.영어번역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백자궤의 경우 궤를 그냥 gwe로 적어두었다.. 좀 무리수를 쓰더라도 box 정도로 번역하는 게 옳다고 본다.

정선의 대형 그림들이었는데 진짜 최고였다. 특히 저 첫번째 그림은 그 공간감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아찔할 정도였다.

이건 윤두서였던가..

추사의 글씨.. 라는 데 이것도.. 전시품은 사면에 제대로 전사해두었는데 읽어볼 내용이 있는 세부 안내판은 그냥 평면에 거치되어서 그걸 읽으려면 관람객이 무리하게 유리벽에 달라붙을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너인 개스비 컬렉션

간송의 육필이라고 하는데
글씨를 잘 쓰진 못했던 것 같고..
다만 우측에서 좌측으로 써나가는 필순임에도 불구하고 잉크 번진 흔적이 없는 게 아주 용했다.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로부터 사들인 청자 세트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간송은 광복 이후에는 굳이 더이상 골동품늘 사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누가 갖는 결국 우리 민족이 갖게 된 것이니 괜찮지 않냐는 입장

몇몇 작춤에서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만한 색을 본 것도 같다.

다만 그 '나라'와 '겨레'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이제는 너무나도 혼미한 세상일 따름이다. 공공의 적이라도 있으면 다소나마 뚜렷해지겠지만

어떤 작품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과연 이 곳에 있는 작품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당시의 서민들은 이러한 작품이나 이러한 작품에 묘사된 생활을 영위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서민인 나는 감사하게도 이런 유산들을 잘 구경할 수 있었다. 다만 엽서 가격이 실로 창렬했다. 한 장당 3천원이라서 정말 떨리 손으로 심사정과 정선의 작품을 골라집었다.

그나저나 희한하게도.. 그림들은 대부분 작가의 이름이 남아있지만, 도자기들은 다 작가의 이름이 남질 않았구나. 씁쓸한 일이다. 너무 오래되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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