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심성론(성기호설, 영지의 기호, 형구의 기호)
정약용의 심성론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정약용의 심성론으로서의 성기호설이 시작되는 시기는 1811년이다. 그는 형 정약전에게 성이 기호라는 것을 창안했다고 서신을 보낸다. 정약용은 성을 기호라는 명제로 한정하여 축소시켰다. 성을 심의 한 속성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호선오악하는 정에 국한시켜 순선한 측면만을 강조했다. 기질적 특성이나 악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은 심의 다른 속성으로 배치했다.
정약용은 일찍이 녹암 권철신의 영향을 받아 도덕본체로서의 주자학적 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의예지는 성의 내용이 아니라, 도덕을 실천한 후에 붙여지는 명칭이며, 성은 인의예지를 가능케하는 원리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초기부터 나온 견해다.
하지만 정약용의 심성론의 초기 체계는 전체적인 논지가 경기 남인의 전통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성은 인의예지를 그 내용으로 하거나 적어도 인의예지라는 덕의 획득을 가능케하는 도덕이성의 주체이자 사단으로 대표되는 순선한 도덕감정의 근원지다.
초기 정약용의 심성론에는 맹자와 순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그로 인한 갈등과 모순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에게는 마음 속에 인의예지가 씨앗처럼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는 지각과 감정, 그리고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성기호설을 주장한다.
1811년 - “항상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을 수 없었지만, 성이란 글자의 뜻이 기호에 있음을 듣고 보니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봄과 같았다.”라고 편지에 젂는다.
성기호설은 우리 마음의 일정한 성향, 즉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정감의 이치가 바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이라는 주장이다.
성기호설의 특징은 여기서 논의되는 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기호로서의 정서는 일정한 대상을 좋아하고, 또 그 반대 대상을 싫어하게끔 만들어진 장치이므로 도덕적 지각이 포함되어 있는 정감이다. 이러한 도덕적 기호로서의 기호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다산은 인성의 선함을 주장한다. (보아하니 나처럼 정약용의 성기호설이 서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의심하는 의견도 제법 많은 모양이다.)
다만 문제는 이처럼 인성을 선하다고 했을 때 주자 성리학에 대해 가했던 역행의 비판에 스스로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기호가 하나이고 그러한 기호가 늘 선하며, 언제든 발현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사람은 어째서 역행(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배 후의 말년에 정약용은 영지의 기호와 형구의 기호를 가지고 성기호설을 설명한다. 형구의 기호는 인심의 기호다. 중기 입장까지만 해도 형구의 기호는 참된 기호로서의 위상을 갖지 못했다. 즉 순선한 기호만을 성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말기에 이르면 성의 성격을 두 가지로 보다 다채롭게 규정한다.
그러나 정약용의 성기호설을 논함에 있어 두 가지 기호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은 말기에 이르러서이며 대다수 학자들이 정약용 사상의 주류로 여기는 중기의 심성론에서 성기호설은 맹자의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호선오악의 기호, 즉 영지의 기호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정약용 심성론의 변천에 관한 연구> - 서울대학교 정소이
위 논문을 요약함.